Calliope · 오늘의 시
자기 통합
자화상
윤동주 · 1939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정음사) 수록. 1939년 9월 작.
단상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미워서 돌아섰다가 가여워서 다시 돌아보고, 끝내 그리워지는 그 사나이는 바로 나 자신이다.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자기 얼굴 앞에서 이렇게 미움과 연민 사이를 오간다. 그 마음들이 한 얼굴 위에 겹쳐질 때, 비로소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 시작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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